260920 '여호와 니시' 골짜기를 걸어가는 사람들에게(시23:4)
몇 해 전 겨울, 늦은 밤 사우스 하일랜드 고개를 넘다가 짙은 안개를 만났습니다. 헤드라이트를 켜도 빛은 몇 미터 앞에서 되돌아왔고, 붙들 수 있던 것은 앞서가는 트럭의 작은 미등 두 개뿐이었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숨을 죽인 채, 그는 그 불빛만 놓치지 않고 고개를 넘었습니다. 마침내 안개가 걷혔을 때, 그는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골짜기가 있습니다.따스한 햇살과 평탄한 초원만을 기대하며 편안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골짜기가 없어지기는커녕 때로 더 낯설고 깊은 골짜기가 안개처럼 우리를 덮쳐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마치 골짜기를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정처럼 말합니다. 왜 이토록 어둡고 깊은 골짜기가 찾아오는 걸까요? 그 골짜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견뎌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여호와 니시 — 나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왜 우리는 골짜기를 지납니까?
첫째, 우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세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마 4:15-16) '죽음의 그늘진 땅'은 시편 23편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땅이 바로 그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좋은 집, 안정된 직장이 삶의 어둠을 걷어내 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고통을 만나는 것은 물에 들어가면 몸이 젖는 것처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 5:45) 골짜기가 찾아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이 아직 천국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골짜기는 잠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잠깐 동안 여러 가지 시험으로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6)
둘째, 의의 길을 걷는 이들은 오히려 더 깊은 골짜기를 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섬기는 이들, 정직과 사랑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오해와 상처를 순종의 길 위에서 만납니다. 시편 기자는 그 골짜기 한복판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 유익하게 되었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주님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시 119:71) 골짜기 없이는 높은 영적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여호와 니시 — 나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자마자, 군사 대오도 갖추지 못한 그들을 아말렉 군대가 습격했습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그 팔을 끝까지 붙들어 주었을 때, 이스라엘은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님은 나의 깃발(여호와 니시)이라." (출 17:15)
그날 싸움에서 이긴 것은 모세의 두 팔이 아니라,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신 싸워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는 고난의 골짜기에서 '여호와 니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며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힘입어서 넉넉히 이깁니다." (롬 8:35, 37) "도살당할 양 같다"고 표현할 만큼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바울이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골짜기에서 여호와 니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
시편 23편은 4절에서 놀라운 문법적 변화를 보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하나님은 3인칭 '그분'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니." 그런데 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라며 2인칭 '당신'으로 바뀝니다. 멀리서 바라보던 '그분'이 짙은 안개 속에서 비로소 '나의 하나님'이 되는 이 순간이 바로 시편 23편의 핵심입니다.
예배당에서 느끼는 감동과 삶의 실제 골짜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직장에서, 병상 곁에서, 경제적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은 삶으로 알게 된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중동의 목자들은 겨울 동안 양들을 가두었다가, 봄이 되면 산 위 목초지로 이끕니다. 그 길에는 반드시 깊고 어두운 골짜기가 있습니다. 양들은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목자를 따라 골짜기를 지나갈 뿐입니다. 믿음은 평탄한 길보다 골짜기에서 자랍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지만, 어두운 협곡 앞에 설 때 비로소 겸손히 무릎을 꿇게 됩니다.
골짜기에서 살아남는 두 가지 방법
첫째, 의지하십시오 —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잘될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 때는 지쳤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찾지 않곤 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자가 없도다." (렘 2:6)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했을 때, 자신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힘과 지혜가 바닥났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여호와 니시를 경험합니다.
이민자로 살아갈 때 우리는 언어의 장벽, 경제적 부담, 자녀 양육의 한계와 같은 골짜기를 수시로 만납니다. 그 골짜기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십시오. 혼자 들고 있기 힘들 때, 아론과 훌이 곁에서 손을 받들어 주었듯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손을 붙들어 주십시오.
둘째, 걸어가십시오 — 견디십시오.
시편은 "골짜기에 주저앉았다"라고 하지 않고 "다닐지라도(걸어갈지라도)"라고 했습니다. 빨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목자를 따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너희는 굳게 참아 견딤으로써 생명을 얻어라." (눅 21:19) 왜 견디기가 어렵습니까?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 모습은 정상에 올라서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럼에도 견디며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선하신 목자가 내 앞에서 길을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이민 생활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긴 골짜기와 같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화, 고향을 떠난 외로움, 세대 간의 갈등, 정착의 불안함까지. 그 안개 속에서 때로는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주저앉지 마십시오. 앞서가는 목자의 작은 불빛을 놓치지 말고, 하루하루 천천히 걸어가십시오. 여호와 니시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이 골짜기를 지나고 났을 때, 우리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니시 —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는 그분을 힘입어 우리는 이기고도 남습니다." (롬 8:35, 37)

